진주 강씨 (晉州 姜氏)
진주 강씨는 2015년 통계 기준 약 132만명으로 우리나라에서 6번째로 인구가 많은 성씨 입니다. 진주 강씨 문중사이트에서 확인 가능한 역사 및 항렬표를 정리했습니다.
목차
진주 강씨(晉州 姜氏) 역사
유래
진주 강씨는 진주 강씨(晉州姜氏)의 시조는 고구려 영양왕 시기에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를 역임한 강이식(姜以式) 장군으로 알려져 있다. 경상남도 진주시를 본관으로 하며 시조 강이식의 후손인 강진이 진양후에 봉해져서 관향을 진주로 삼은 데에서 기인한다. 거의 유일한 고구려계 성씨이다.
진주에 세거한 것은 고구려 멸망 이후 당 황제가 인재를 발탁하기 위해 실시한 과거에서 강진(姜縉)이 장원 급제한 후 태중대부 판내의령 (太中大夫判內議令)을 역임하다가 진양후(晋陽候)에 봉해진 이후이다. 이 때부터 진주 강씨의 본관을 진주(晉州)로 하게 되었다.
시조 강이식 장군
강이식 장군은 서기 597(영양왕 8)년 수나라 문제(隋文帝)가 고구려를 침범할 야욕으로 사신(使臣)에게 국서(國書-외교문서)를 고구려에 보내 왔는데 국서 내용이 지극히 모욕적이고 위협과 야유스러운 내용이었다. 영양왕이 여러 대신들을 모아놓고 회신할 내용을 의논할 때 군신간의 의견이 여러 갈래였으나 강이식 장군만이 이같이 무례한 글은 붓으로 답 할 것이 아니라 칼로 답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면서 전쟁할 것(개전 : 開戰)을 주장하였다.
영양왕은 이를 기꺼이 받아들여 강이식 장군을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삼아 정병 5만명으로 하여금 요동에 있는 임유관(臨關)으로 출전하여 첨예병 1만으로 요서(遼西)를 공격하고 수병을 유인, 글안병 수천으로 바다를 건너 지금의 산동(山東)을 쳤으며, 이듬해 다시 대병(大兵)을 이끌고 요서지방을 정벌, 수나라 요서총관 장충(張沖)과 접전, 임유관으로 거짓 퇴병(退兵)하자 수문제는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한왕(漢王) 양량(楊諒)을 대총관(大摠管)으로 삼아 임유관을 향하게 하고 주라후(周羅喉)로 하여금 평양으로 진격하는 척 속였으나, 강이식 장군은 주라후가 양선(糧船)을 이끌고 요해(遼海)에 이르러 임유관으로 진격하는 양량에게 군량미를 보급하기 위한 속임수 임을 미리 탐지하고 수군(水軍)으로 하여금 즉각 요격하여 주라후의 양선을 격파하니 수병은 군량미 보급이 끊어지고, 또 6월의 장마를 만나 기근과 질병으로 대패하고 말았다.
그 후 수문제는 고구려를 두려워 하고 강화를 맺고 상품 교역을 재개, 십 수년이 지난 뒤 수문제의 아들 양제(煬帝)가 113만 대군을 이끌고 612년(영양왕 23년) 고구려를 재 침공하자, 강이식 장군이 수륙양군(水陸兩軍)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가 되고, 왕제(王弟) 건무(建武)는 해안을 맡고,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육지를 맡아 이에 대항하였다.
한편 수양제는 단숨에 평양성을 공격하기 위해 별동대 30만 5천명을 압록강 서쪽에 집결시키자 을지문덕은 거짓 패하여 적을 평양성 북쪽 30리까지 유인하자 속은 것을 알고 회군하다가 살수(지금의 청천강)에서 대패하였다. 이로 인하여 수나라는 망하고 당(唐)나라가 건국되었다.
강이식 장군의 묘소는 만주 심양현(瀋陽縣) 원수림(元帥林)에 있으며 봉길선(奉吉線) 원수림 역전(元帥林驛前)에 병마원수강공지총(兵馬元帥姜公之塚) 이란 큰 비가 있었다고 하나, 중국 문화혁명 당시 소멸되었고 현재 묘역(墓域)은 밭으로 개간되었고 묘지(墓趾)에는 돌조각과 거북좌대만 남아있다.
무신 정변
고려 때 영상서를 지낸 정절공 강구만의 집 뒤 대봉산 중턱에 거대한 바위가 얹혀있었다. 크고 작은 바위가 기묘하게도 봉황의 형상을 이루어 봉(鳳)바위라 불렀다. 어느 날 도사가 이곳을 지나다 봉바위를 보고 "강씨의 대성함이 이 바위에 있다"고 점쳤다는 설화가 구전되고 있다.
고려 제17대 인종 22년. 강씨 가문의 번성을 시기한 무신(武臣) 척준경이 왕에게 "강홍의 형제일당이 반정을 도모하고 있으니 속히 조처하지 않으면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고 간언했다. 이에 대노한 인종은 상서 강홍 형제와 일족 20명을 참살시켰다. 그리고 강씨 문중에 번성을 가져다주었다는 대봉산의 이름을 봉을 날려보낸다는 뜻으로 대봉산을 비봉산으로 고쳤다. 또 봉바위 근처의 연못인 봉지의 이름을 부지(속칭·가매못=봉을 가마솥에 삶는다는 뜻)로 고치기까지 했으니 진주 강씨 가문에 몰아친 시련이었다.
소현세자빈 사사 사건
강씨 문중이 가장 비극적인 사화를 겪은 것은 조선 16대 인조 때의 소현세자빈(강씨) 사사 사건이다.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의 빈인 강씨는 인헌공파 강감찬 장군의 후손이며 우의정을 지낸 강석기의 딸이었다. 병자호란 후 1637년 소현세자와 함께 심양으로 볼모로 갔다가 1645년 귀국하였다.
귀국 후 2개월만에 소현세자는 급사하는데 독살로 추정되었다. 당시 후궁 조씨와 김자점의 참언으로 강빈은 인조저주 사건과 같은 역모혐의와 소현세자 독살 사건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는 누명을 쓰고 1646년에 사약을 마시는 비운을 겪는다. 그 후 강빈의 가족들은 처형되거나 고문으로 죽었으며, 소생인 세 아들도 제주에 유배되었고 집안은 쇠락했다고 한다. 이후 1717년(숙종 43)에 강빈은 복위되고 민회빈으로 봉해졌으며, 가족들도 복관, 증직되었다.
분파
진주 강씨가는 박사공파(博士公派)·소감공파(少監公派)·시중공파(侍中公派)·은열공파(殷烈公派)·인헌공파(仁憲公派) 등 크게 5개의 파로 뻗어나가 있으며, 이 중 박사공파가 대종파(大宗派)로 전체 강씨 인구의 약 80%를 차지하고 있다.
박사공파는 진주 강씨 21대 손인 박사공 강계용(姜啓庸)을 파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고려 때 국자박사(國子博士: 現 국립대학 교수)를 지냈고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을 다녀와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에 봉해졌다. 한편 박사공파는 강계용의 손자인 강사첨(姜師瞻: 진주 강씨 23대 손)이 어사를 지냈다고 하여 어사공파(御史公派)로 불리기도 한다.
- 박사공파 : 강계용(姜啓庸)
- 은열공파 : 강민첨(姜民瞻)
- 소감공파 : 강위용(姜渭庸)
- 시중공파(관서대장군파) : 강원용(姜遠庸)
- 인헌공파 : 강궁진(姜弓珍) ☞ 금천 강씨로 분성
염제 신농씨와 진주 강씨
강씨 족보에 따르면, 강이식 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는 조상이 강태공이다. 강태공은 중국 주나라 건국에 절대적인 공을 세운 인물로, 그 공으로 지금의 산동성 지역의 봉토를 받아 나라이름을 제(齊)로 하여 제나라를 건국하였다. 진주 강씨 문중은 중국의 강태공 후손들과 더불어 매년 9월 12일 중국 산동성 치박시 임치구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또한, 강태공에서 더 거슬러 올라갈 경우 중국 염제 신농씨(炎帝 神農氏)가 나온다. 염제 신농씨는 중국 고대 삼황(三皇) 중 한명이며, 사기(史記)에 의하면 신농(神農)의 이름은 석년(石年), 천수(天水)지방에서 출생하여 강수(姜水)땅에서 자랐기 때문에 성(姓)을 자란곳 지명을 따서 姜이라고 정하였다. 천수(天水)땅은 현재 감숙성(甘肅省) 위천현(渭川縣)인데 한(漢)나라 때는 천수(天水)라고 했고, 강수(姜水)는 현재 기서성 (岐西省)을 말한다.
진주 강씨(晉州 姜氏) 항렬표
(1) 박사공파 (대장군공파)
世 | 대장군공(창부昌富)파 |
21 | 淵연O |
22 | O桓환 |
23 | 燦찬O 炳병O |
24 | O基기 O圭규 |
25 | 鎭진O 鍾종O |
26 | O源원 O漢한 |
27 | 東동O 相상O |
28 | O煥환 O然연 |
29 | 圭규O 載재O |
30 | O鎬호 O鉉현 |
31 | 洪홍O 泰태O |
32 | O植식 O柱주 |
33 | 炫현O 熇효O |
34 | O均균 O墉용 |
35 | 銖수O 鉦정O |
36 | O洛락 O汶문 |
37 | 根근O 杬원O |
38 | O炅경 O焃혁 |
39 | 在재O 基기O |
40 | O鋒봉 O銅동 |
41 | 泂형O 淙종O |
42 | O松송 O栢백 |
(2) 박사공파 (진원부원군파)
世 | 통계공파 | 통정공파 |
21 | 在재O | |
22 | O會회 O欽흠 | |
23 | 漢한O 源원O 永영O | |
24 | O馨형, O元원 | O秀수 |
25 | 昌창O, 熙희O | 大대O |
26 | O기基, O信신 | O遠원, O中중 |
27 | 錫석O | 聲성O, 鎬호O |
28 | O澤택 O淳순 O求구 | |
29 | 來래O 模모O 秉병O | |
30 | O焌준 O顯현 O默묵 | |
31 | 培배O 應응O 敎교O | |
32 | O鍊련 O鐘종 O鐸탁 | |
33 | 雨우O 湜식O 浚준O | |
34 | O榮영 O樺화 O穆목 | |
35 | 熏훈O 炯형O 煇휘O | |
36 | O垠은 O喆철 O奎규 | |
37 | 鉀갑O 鈺옥O 鎭진O | |
38 | O澈철 O沅원 O濟제 | |
39 | 稙직O 杉삼O 桓환O | |
40 | O煜욱 O炳병 O烈열 | |
41 | 壽수O 時시O 坰경O | |
42 | O鎔용 O鎰일 O銑선 |
(3) 은열공파(밀직공파, 학사공파, 호부사공파, 사평공파, 진사공파)
世 | 항렬 |
23세 | ㅇ周주 |
24세 | ㅇ善선 |
25세 | 泰태ㅇ |
26세 | ㅇ植식ㅇ 秉병 |
27세 | 熙희ㅇ 煥환ㅇ |
28세 | ㅇ圭규 ㅇ瑞서 |
29세 | 銓전ㅇ 鍊련ㅇ |
30세 | ㅇ洙수 ㅇ淳순 |
31세 | 柄병ㅇ 桂계ㅇ |
32세 | ㅇ琰염 ㅇ壎훈 |
33세 | 在재ㅇ 基기ㅇ |
34세 | ㅇ鎔용 ㅇ鐄횡 |
35세 | 洛낙ㅇ 準준ㅇ |
36세 | ㅇ模모 ㅇ來래 |
37세 | 炳병ㅇ 然연ㅇ |
38세 | ㅇ均균 ㅇ埰채 |
39세 | 鉉현ㅇ 鎭진ㅇ |
40세 | ㅇ源원 ㅇ潤윤 |
41세 | 秀수ㅇ 杓표ㅇ |
(4) 은열공파(첨사공파)
世 | 항렬 |
26세 | ㅇ植식 |
27세 | 熙희ㅇ 煥환ㅇ ㅇ權권 |
28세 | ㅇ在재 ㅇ圭규 瑞서ㅇ |
29세 | 錫석ㅇ 鍊련ㅇ ㅇ鎬호 |
30세 | ㅇ永영 ㅇ洙수 淳순ㅇ |
31세 | 秉병ㅇ 東동ㅇ ㅇ相상 |
32세 | ㅇ薰훈 ㅇ大대 薰훈ㅇ |
33세 | 周주ㅇ 基기ㅇ |
34세 | ㅇ鍾종 ㅇ鎔용 |
35세 | 永영ㅇ 浩호ㅇ |
36세 | ㅇ來래 ㅇ模모 |
37세 | 炳병ㅇ |
38세 | ㅇ均균 ㅇ埈준 |
39세 | 鎭진ㅇ 鉉현ㅇ |
40세 | ㅇ源원 ㅇ沂기 |
41세 | 恒항ㅇ 榮영ㅇ |
(5) 은열공파(첨사공파-판서공계)
世 | 항렬 | |
31 | O日일 | |
32 | 宇우O | |
33 | O奎규 | O鐄횡 |
34 | 聖성O | 河하O |
35 | O根근 | O模모 |
36 | 炳병O | 熺희O |
37 | O基기 | O埰채 |
38 | 鎭진O | 鉉현O |
39 | O源원 | O潤윤 |
40 | 秀수O | 杓표O |
41 | O煥환 | O燮섭 |
(6) 소감공파
世 | 항렬 | |
21 | 덕(德)○ | 필(弼)○ |
22 | ○성(聖) | ○재(載) |
23 | 철(哲)○ | 진(鎭)○ |
24 | ○목(穆) | ○해(海) |
25 | ○치(致) | 지(枳)○ |
26 | 익(翼)○ | 석(錫)○ |
27 | ○규(奎) | ○순(淳) |
28 | 건(鍵)○ | 용(鏞)○ |
29 | ○연(淵) | ○숙(淑) |
30 | 영(榮)○ | 래(來)○ |
31 | ○희(熙) | ○열(烈) |
32 | 배(培)○ | 준(埈)○ |
33 | ○현(鉉) | ○종(鍾) |
34 | 위(渭)○ | 락(洛)○ |
35 | ○식(植) | ○근(根) |
36 | 병(炳)○ | 찬(燦)○ |
37 | ○기(基) | ○균(均) |
38 | 진(鎭)○ | 용(鎔)○ |
39 | ○태(泰) | ○제(濟) |
40 | 표(杓)○ | 항(恒)○ |
41 | ○환(煥) | ○훈(薰) |
(7) 시중공파(관서대장군파)
세 | 항렬 |
21 | 潤윤ㅇ |
22 | ㅇ模모 |
23 | 魯노ㅇ |
24 | ㅇ基기 |
25 | 善선ㅇ |
26 | ㅇ淳순 ㅇ求구 |
27 | 寅인ㅇ 柄병ㅇ |
28 | ㅇ夏하 ㅇ煥환 |
29 | 奎규ㅇ 址지ㅇ |
30 | ㅇ鉉현 ㅇ鎬호 |
31 | 浩호ㅇ 沅원ㅇ |
32 | ㅇ述술 ㅇ植식 |
33 | 憲헌ㅇ 炤소ㅇ |
34 | ㅇ遠원 ㅇ在재 |
35 | 鍾종ㅇ 鎔용ㅇ |
36 | ㅇ洙수 ㅇ泳영 |
37 | 秉병ㅇ 相상ㅇ |
38 | ㅇ熙희 ㅇ煜욱 |
39 | 埈준ㅇ 堯요ㅇ |
40 | ㅇ鍵건ㅇ 鎭진 |
41 | 承승ㅇ 淙종ㅇ |
(8) 인헌공파 ☞ 금천 강씨로 분성
세 | 항렬 |
29 | ○석(錫) |
30 | 해(海)○ |
31 | ○근(根) |
32 | 연(然)○ |
33 | ○균(均) |
34 | 호(鎬)○ |
35 | ○한(漢) |
36 | 수(秀)○ |
37 | ○희(熙) |
38 | 기(基)○ |
39 | ○진(鎭) |
40 | 제(濟)○ |
41 | ○직(稙) |
42 | 병(炳)○ |
43 | ○규(奎) |
44 | 종(鍾)○ |
45 | ○호(浩) |
46 | 상(相)○ |
47 | ○환(煥) |
48 | 지(志)○ |
49 | ○현(鉉) |
진주 강씨(晉州 姜氏) 문중사이트 및 자료
항렬 일람표 (진주 강씨 중앙종회)
진주강씨 중앙종회
진주강씨 박사공파
금천강씨 대종회
마무리
저도 진주 강씨 박사공계 통정공파 후손으로서 항렬표와 역사에 대해 정리해보고 배워본다는 마음으로 포스팅했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며 내용을 읽다보니, 가문이 빛날때도 있지만 때로는 시련도 있는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기록되기 때문에 역사와 후손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겠다 다짐하며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포스팅이 진주 강씨 항렬표를 찾으시는 분에게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혹시 틀린 부분이나 보완사항 말씀해주시면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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